하도 야학강습소

하도강습소 제1회 졸업기념(맨 윗줄 가운데 부춘화, 둘째 줄 왼쪽으로 두 번째 김옥련, 오른쪽으로 첫 번째 고순효, 두 번째 부덕량)_해녀박물관 소장
정의
1923년 하도리에 설립된 사립하도보통학교의 부설 야학강습소.
내용
1919년 2월 10일 구좌면 하도리에 사립하도개성의숙이 개설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도리 주민들이 1923년 4월 5일 4년제의 사립하도보통학교 인가를 받았고 같은 해 11월 1일 개교했다. 초대 교장은 학교 설립의 주역인 강공칠이었다.
지금까지 1921년 4월 5일 개교한 것으로 알려져왔으나 당시 《조선일보》 기사를 통해서 정확한 학교 설립인가 일과 개교일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일보》 1923년 5월 18일자에는 “구좌면 하도리에서는 1만여 원을 모집하여 사립보통학교를 설립코자 활동 중. 당국에 사립학교 설립 허가원을 제출하여 4월 5일부로 인가를 받았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조선일보》 1923년 12월 14일자에는 “오사 카 도산중학교를 졸업한 현길홍, 경성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한성은행 오사카지점에 근무하던 서재완을 교사 로 초빙하여 1923년 11월 1일 개교했다.”고 했다.
학교 설립을 위한 하도리 마을 유지 및 주민들의 열성에 대해서도 같은 신문에 잘 소개되어 있다. 《조선일보》 1923년 3월 25일자에는 “하도리 유지의 각성으로 1919년경부터 개량사숙을 설립하여 아동교육에 열심인데 향학열이 비등하여 입학지원자가 매일 수백 명에 달하여 입학하고자 하나 교실이 협착하여 수용치 못하고 반수 이상은 퇴출한 바 입학치 못한 아동들은 눈물 흘리며 도로에 방황한다. 이에 하도리 유지 강공칠, 부원경, 김창무 외 제씨의 발기로 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하기로 계획하니 마을 인사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금전, 토지, 물품 등의연이 답지하여 그 액수가 무려 1만3천 원에 달했다. 불과 3백 호의 촌락에서 거액을 출연하여 보통학교를 설립 한다고 하니 근방에서 모범촌이라는 찬양이 그치지 않고 있다.”고 당시 분위기를 소개했다. 이어서 《조선일보》 1923년 4월 11일자에도 “지역 유지들의 발기로 사립보통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는데 마을 인사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하여 의연금이 답지하고 있다.”고 했다. 두 기사 끝에는 출연금을 낸 주민들의 명단과 액수가 소상하게 기재되어 있다.
사립하도보통학교는 1926년 4월 1일 2년제의 보습과 증설을 인가받았고 1929년 4월 1일 4년의 보통학교와 보습과 2년에서 6년제 보통학교로 승격했다. 1929년 5월 30일 사립하도보통학교는 굴동에서 현 위치로 이설했다.
현재의 학교 교문 옆에 세워진 비석에는 “원래 사립하도보통학교 설립자 고 강공칠 씨 기념비.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 학교를 창설하고 힘써 운영하여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라고 새겨 있다.
하도보통학교 설립을 위해 학교설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우선 학교 설립기금으로 1만 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당시 1만 원은 매우 큰 금액이어서 하도리 주민들이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설립기금 조성에 어려움이 많았다. 추진위원회 역원들이 각 가정을 일일이 방문하며 모금했으며 남에게 빌려서 출연한 돈의 이자가 누적되어 나중에는 마소나 밭을 팔아서 빚을 갚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특히 여성으로서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거액을 기부한 분들이 있었는데 절부 부씨(310원), 절부 오씨(320원), 절부 홍씨(280원) 등이다.
특징과 의의
해녀투쟁의 주도자인 부춘화·김옥련·부덕량·고순효·김계석 등은 모두 하도보통학교 부설 야학강습소 제1회 졸업생으로서 문무현·부대현·김태륜 등 청년 지식인 교사들에게 민족교육을 받았다. 이들 하도리 해녀들은 청년 교사들로부터 《농민독본》·《노동독본》 등의 계몽서를 배우고 한글·한문뿐만 아니라 저울 눈금 읽는 법까지 교육받았다고 한다.
참고 문헌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2014.
<下道里人士의 敎育熱>, 《조선일보》, 1923년 3월 25일자.
<下道學校에 義 捐金>, 《조선일보》, 4월 11일자.
<下道私普校認可>, 《조선일보》, 5월 18일 자.
<下道普校開校式>, 《조선일보》, 12월 14일자.
필자
박찬식(朴贊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