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기 어장 침탈
정의
1876년 개항 이후 잠수기 어선을 이끌고 제주도 어장에 진출한 일본 어민의 침탈 상황과 인명 살상 사건.
내용
1876년 개항 이후 선진 어업기술을 갖춘 일본 어민들은 국가권력의 비호 아래 제주 연해에 진출하여 어장을 침탈했다. 이 때문에 수산자원이 고갈되어 제주도민들은 커다란 타격을 받게 되었다.
특히 1883년 7월 25일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된 뒤 일본 어민의 제주 어장 침탈은 급격히 증가했다. 나가사키[長崎]현 어민들이 제주 어장에 진출하여 막대한 수익을 거둔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일본 잠수기 어선의 제주 침투가 심해졌다. 1884년 4월 22일 통상장정에 의해 통어권을 주장하면서 대마도 이즈하라[嚴原]촌의 이와사키 츄타[岩崎 忠太]가 잠수기선단을 이끌고 서귀포에서 조업하려고 했으나 제주의 지방관과 도민들이 통어의 부당성을 내세워 거절함으로써 돌아갔다. 1884년 5월에는 대마도 어민 후루야[古屋利涉]가 잠수기선단 3척을 이끌고 서귀포에서 조업하려 했는데 역시 도민들의 큰 반발 때문에 제주목사가 일본 어민의 조업을 저지하고 귀향 조치했다.
일제강점시대의 잠수기업_《제주시수협 100년사》
잠수업은 본래 해녀들의 전업이었으나 1880년대 말부터 일본인들에 의해 잠수기선이 본격 도입되면서 그 작업도 기계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잠수기 어업의 창시자로서 가파도를 근거지로 하는 요시무라 쿠미[吉村組]가 기계선 12척, 운송선 5척으로 조업을 했는데 요시무라[吉村與三郞]는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으로서 1882년부터 제주도·거문도 어장에서 어업 활동을 했다. 1880년대 말에는 본격적으로 제주 어장에서 해삼과 전복 등을 채취하여 청국으로 수출하는 등 1889년 한 해에만 22,000엔의 수익을 올렸다.
이들은 잠수기선을 대거 몰고 와 제주 바다의 밑바닥까지 훑어서 전복·해삼·해초 등을 모조리 긁어가 버렸다. 주로 전복과 해삼을 잡았는데 전복은 8~12월, 해삼은 1~3월에 채취했다. 배 1척당 1개월 채취량은 전복 800근, 전복갑 900근, 해삼 600근이 평균치였다. 1880년대까지는 전복갑 크기가 8촌 내지 1척이나 되는 거대한 전복도 많았으나 10년이 지난 뒤로부터는 평균 6촌으로 작아지고 말았다. 이는 무분별한 잠수기선이 깊은 바다 밑바닥을 무분별하게 전부 훑어버렸기 때문이다. 해녀들의 작업으로 이들 수산물을 채취해 오던 제주 잠수업은 잠수기선의 등장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제주도민들은 계속되는 일본 어민의 어장 침투에 대해 즉각 반발하고 제주목사와 중앙정부에 시정을 강력히 촉구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 정부와 협상하여 1884년 9월부터 일본 어민의 제주 통어通漁에 대한 잠정 금지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본 어민들은 제주도 주요 포구를 무대로 불법 어로활동을 전개했다. 1884년 일본 어민들은 제주 연안에서 전복 6,000근을 포획했고 서귀포·가파도·우도·비양도·방두포·건입포 등지에 수십 척의 일본어선이 침투했다. 이들은 불법 어로에 그치지 않고 연안 마을에 상륙하여 주민 살상, 부녀자 겁탈, 재물 약탈, 상품의 밀매 행위 등을 자행했다. 1887년 3월 후루야가 선단을 이끌고 다시 제주 연해에 도착하자 도민들은 병기를 들고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도민 대표 15명이 상경하여 향후 일본 어민의 제주 침투 재발을 엄중히 금지해 주도록 촉구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해 일본 어민의 불법 어로행위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결국 제주도어업권 협상이 원만하게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 어민들과 제주도민 사이에 긴장 상태가 조성되었고 제주도민 살상 사건이 일어났 다. 1887년 8월 가파도에서 전복을 캐던 일본 어선 6척(후루야 선단)이 모슬포에 내려서 닭과 돼지를 약탈하고 주민 이만송李晩松 등을 살상했던 것이다.
1890년 5월 17일에는 일본 어민 아라키[荒木坂四郞]·우라 마츠[浦松次郞] 등이 배령리(한림읍 금능리)에 상륙하여 주민 양종신梁宗信을 살해했다. 이어서 1891년 5월 15일 제주목 건입포에서 일본 어민들이 허가없이 어로행위를 하다가 이에 반발한 주민 16명에게 총과 칼로 상해를 입혔는데 그중에서 임순백任順伯이 즉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892년 2월에는 일본 어민 144명이 어선 18척을 타고 성산포에 불법으로 상륙했다. 그들은 어막을 짓고 생활하며 어로활동을 하다가 쫓겨난 뒤 총과 칼로 무장하고 마을에 난입하여 행패를 부리던 중 주민 오동표吳東杓가 일본 어민 이 발사한 총에 맞아 즉사했다.
이러한 일본 어민의 침탈과 만행에 대하여 제주도민들은 생존권 수호를 위한 적극적 투쟁을 전개했다. 1891년 3월에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조선 정부로부터 순심관 이전李琠이 내려오자 도민들은 봉기하여 일본에 대한 제주 어업 침탈 허용에 항거했다. 도민들은 이전이 머물고 있는 처소에 몰려가 관원들을 구타하고 순심관을 배에 태워 내쫓아버림으로써 강력한 저항을 했다.
한편으로 이러한 일본 어민의 어장 침투에 대해 제주 어민들은 중앙정부에 기대지 않고 직접 대응하여 나갔다. 연안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순포巡捕를 두어 일본 어민의 침탈을 막고자 했다. 이후 지방관이 순포의 배치를 인정하고 관련 경비를 지원했다. 순포는 50명 이내로 선발하여 포구의 주요 지점에 배치했는데 일본 어선이 정박한 곳에는 연대로 하여금 순찰하게 하고 일본인이 육지에 내리면 그 경위를 묻게끔 했다. 1892년 11월 일본 어민의 어채와 약탈행위를 저지하기 위해서 연해 73개 마을에 순포를 설치했다.
참고 문헌
강만생, <한말 일본의 제주어업 침탈과 도민의 대응>, 《제주도연구》 3, 1986.
박찬식, <개항 이후 일본 어업의 제주도 진출>, 《역사와 경계》 68, 2008.
이영록, <제주도민 살해사건과 일본영사재판–이만송 살해사건을 중심으로>, 《법과 사회》 26, 2004.
한우근, <개항후 일본어민의 침투 (1860~1894)>, 《동양학》 1, 1971.
필자
박찬식(朴贊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