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 |
고문헌 |
함흥과 영흥의 입격(入格)한 유생과 무사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고, 내각은 《풍패빈흥록(豐沛賓興錄)》을 간행하여 반포(頒布)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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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한국고전종합DB |
정조19년 (1795) |
97 |
2999 |
고문헌 |
내탕전(內帑錢) 1만 민(緡)을 탐라(耽羅)에 별도로 내려 주어 진휼의 재원으로 삼게 하고, 이어 도신과 수신(守臣) 및 연읍(沿邑)의 수령을 신칙하여 해산물의 이익으로 무역하는 일을 착심(着心)하여 권장하게 하고 빈마(牝馬)를 육지에 헐값으로 내다 파는 일에 대해서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하여금 직접 단속하게 하였다. 3개 읍의 권농(勸農)하는 정사에 대해 별도로 더 엄하게 신칙하게 하고, 이어 대내에서 내린 돈으로 호남에서 올해 바쳐야 할 상부(常賦)와 응공(應貢) 중에서 형편에 따라 제해 두었다가 곡물로 바꾸어 보내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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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한국고전종합DB |
정조20년 (1796) |
102 |
2998 |
고문헌 |
전라 감사 서정수(徐鼎修)와 제주 목사(濟州牧使) 유사모(柳師模)가, 별도로 내린 진휼 물자가 무사히 도착하였으며 섬 안 3개 읍의 모맥(牟麥 보리) 농사가 풍년이 들었다고 급히 장계한 데 대해, 유사모는 민정(民情)을 더욱 잘 살펴 다시 나에게 보고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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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한국고전종합DB |
정조20년 (1796) |
103 |
2997 |
고문헌 |
성정각(誠正閣)에서 약원 제조 심이지(沈頤之)와 부제조 이면응(李冕膺)을 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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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한국고전종합DB |
정조20년 (1796) |
106 |
2996 |
고문헌 |
바다를 표류한 탐라(耽羅) 사람인 전 충장장(忠壯將) 이방익(李邦翼)을 걸맞은 관직에 조용(調用)하라고 명하고, 이어 전라 감영의 중군과 자리를 바꾸어 주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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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한국고전종합DB |
정조21년 (1797) |
101 |
2995 |
고문헌 |
평안도 관찰사는 현충사(顯忠祠)에 나아가 ‘만상의 의사 백대호 등 21인〔灣上義士白大豪等二十一人〕’이라고 위패(位牌)에 쓰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낼 때 돼지와 한 말의 술을 쓰는 것을 정식으로 삼으며 황명(皇明)의 유민(遺民) 임인관(林寅觀) 등 95인에 대해 모두 위패를 만들어 함께 제사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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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한국고전종합DB |
정조22년 (1798) |
81 |
2994 |
고문헌 |
성정각에서 승지 홍국영을 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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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한국고전종합DB |
정조원년 (1777) |
87 |
2993 |
고문헌 |
성정각에서 대사성 유당(柳戇)을 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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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한국고전종합DB |
정조2년 (1778) |
98 |
2992 |
고문헌 |
성정각(誠正閣)에서 대신 및 비변사 당상과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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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한국고전종합DB |
정조10년 (1786) |
81 |
2991 |
고문헌 |
성정각(誠正閣)에서 대신과 비변사 당상 및 봉조하 조돈(趙暾)을 소견(召見)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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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한국고전종합DB |
정조13년 (1789) |
87 |
2990 |
고문헌 |
선전관 양협(梁埉)ㆍ심유조(沈有祖)ㆍ이인달(李仁達)은 병조 판서로 하여금 교관(郊館)에서 개좌(開坐)하여 크게 위의(威儀)를 베풀고 곤(棍) 30도(度)를 엄하게 쳐서 섬에 충군(充軍)하게 하고, 이동선(李東善)ㆍ이주봉(李周鳳)ㆍ김준악(金峻岳)ㆍ유상두(柳相斗)ㆍ허빈(許彬)ㆍ김진정(金鎭鼎)ㆍ원영린(元永麟)ㆍ전우성(田遇聖)은 모두 엄하게 곤을 쳐 태거(汰去)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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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한국고전종합DB |
정조17년 (1793) |
94 |
2989 |
고문헌 |
상께서 야주개(夜晝峴)에 나아가셨는데, 내가 뒤따라 나아가서 대내(大內)로 돌아가실 것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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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
한국고전종합DB |
영조45년 (1769) |
1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