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옹기장

제주도 옹기장이란 제주도 전통옹기인 허벅이나 항아리, 고소리 등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만드는 기능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표선면 토산리 거슨새미 물허벅

제주도 옹기장이란 제주도 전통옹기인 허벅이나 항아리, 고소리 등 질그릇과 오지그릇을 만드는 기능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제주도의 옹기는 잿물을 입히지 않고 돌가마로 구워 가마환경과 자연유에 의해 부분적으로 윤기가 있는 붉은색의 오지그릇과 낮은 온도에서 연기를 침투시켜 그릇표면이 검은 회색을 띠는 질그릇을 통징한다는 말이다.

제주도 옹기는 예전부터 생활에 필요한 용구를 용도에 맞게 다양하게 제작했으며,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고 생활 곳곳에 자리 잡고 있던 제주문화의 숨겨진 정수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제주도 용기의 제작이나 사용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전해져 오는 문헌을 통해 살펴볼 때, 1520년 김정이 쓴 [제주풍토록]을 보면 제주도에 사기, 도시, 유철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로 보아 16세기까지는 제주도에 옹기가 생산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7세기 들어 옹기가 제주도에서 자체 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형상 목사의 [남환박물]에 기와, 옹기, 목기 등이 제주 산물로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제대박물관 옹기류 전시

제주도 옹기 제작기술은 일반적으로 전라도 지방을 통해 전라도 옹기 제작 기술이 제주도로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도 옹기 제작기법이 전라도 옹기 제작기법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 때문이다. 제주도로 유입된 전라도 옹기 제작기법은 옹기를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을 찾게 되고, 제작이 이루어지면서 점차 제주도의 자연환경에 맞게 적응하면서 생겨난 것이 제주도 옹기이다. 특히 서귀포시 대정읍 지역에 옹기문화가 정착된 것은 이 지역의 흙이 육지부의 흙과 비슷한, 점성이 좋은 암갈색토와 절갈색의 비화산회토가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 옹기는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활발히 제작되어 일상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1948년 4.3사건으로 옹기 제작 기능을 지닌 남성들이 많이 사망했고, 1960년대 들어 플라스틱 용기의 대량 공급이 식생활을 변화시키면서 1970년대에 이르러 옹기 제작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물팡과 물허벅

제주도 옹기자 사라지게 된 이유는 제주도 옹기 제작에서 운영방식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제주도 옹기 제작은 철저하게 전문적인 분업으로 작업이 이루어졌다. 굴(가마)의 축조와 보수 및 관리를 맡은 굴대장, 흙을 선별하고 토림을 만드는 질대장, 옹기를 성형하는 도공장, 굴(가마)에서 건조된 성형 옹기를 굽는 불대장과 같이 네 개의 영역으로 세분화되어 있다. 또한 이 모든 옹기 제작과 운영은 마을 단위로 혹은, 친분 있는 사람들이 모여 조직화된 굴제(굴계)가 맡아서 추진했다.

이런 조직화된 체계로 옹기 제작이 이루어져 왔는데, 1970년대 초 옹기 제작이 단절된 때를 즈음하여 각각의 전문화된 영역에만 집중하여 작업하다 보니, 어느 한 영역의 사람이 빠지게 되면 옹기 제작에 차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큰 단절 이유는 시대 변화에 따른 플라스틱 용기의 출현 때문이라고 본다.

©60년대 산지천_옹기운반선

제주 전통옹기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면서 과거 옹기작업에 종사했던 전문적인 기능을 지닌 장인들은 감귤 농사나 다른 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제주 돌가마를 비롯한 옹기 관련 시설들이 곳곳에서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보존이 양호한 몇몇 가마가 남아있어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제58-1호(구억리 섯굴노랑굴), 58-2호(구억리 검은굴), 58-3호(신평리 일곱드르 노랑굴) 그것이다.

제주도 옹기는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활발히 제작되어 일상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1948년 4.3사건으로 옹기 제작 기능을 지닌 남성들이 많이 사망했고, 1960년대 을어 플라스틱 용기와 보급이 식생활을 변화시키면서 1970년대에 이르러 옹기 제작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60년대 산지천 옹기장사

이후 20여 년 동안 제작하지 못하던 제주 옹기는 1990년대 들어오면서 전통옹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 다시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2001년 8월 16일 제주특별자치도 무형유산으로 제주도 허벅장이 지정되고 보유자로 신창현(1940년생)이 인정되었다. 2008년 6월 사단법인 ‘제주전통옹기전승보존회’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복원작업과 활성화가 이루어진다. 2011년 9월 27일 무형유산 제주도 허벅장은 과거 제주도 옹기의 생산방식에 따라 제주도 옹기장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고 기능별로 보유자 지정을 확대하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허벅장 1인의 전승체계를 옹기장 속에 굴대장, 질대장, 도공장, 불대장 등 네 가지 영역을 세분하고 각 기능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각각 보유자를 지정한 것이다.

2011년 제주도 옹기장 기능보유자로 도공장에 고원수(1932년생, 고산리), 신창현(1940년생, 구억리), 굴대장에 고홍수(1921년생, 신평리), 질대장에 이윤옥(1938년생, 신평리), 불대장에 강신원(1931년생, 신평리)이 지정되었다. 2012년 보유자 밑에 전승교육사로 부창래(1933년생), 고달순(1934년생), 허은숙(1968년생), 김정근(1971년생)이 인정되었고 전수장학생에 문을심(1977년생)이 선정되었다.

©1971년 동문시장 옹기점

이후 2013년 도공장 고원수와 불대장 강신원의 별세로 2014년 6월 도공장에 부창래, 굴대장에 김정근이 보유자로 각각 인정되었다. 2015년 제주도 옹기장 전수장학생으로 김서진(1969년생), 고기백(1973년생), 고익진(1972년생), 강민지(1992년생)가 선정되었고, 2017년 1월 도공장 신창원이 보유자에서 명예보유자로 변경 인정되었다. 2019년 고달순이 비어 있던 불대장 보유자로 인정되면서 전수체계가 마련되고 활발한 전수활동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불대장 보유자 인정 1년만에 고달순이 별세하자 그해 11월 불대장 전수장학생 김서진이 전승교육사로 인정되고, 오중석(1968년생)이 전수장학생으로 추가 선정되었다.

2021년 제주특별자치도 무형유산 제주도옹기장 지정 현황을 보면 명예보유자에 신창현(도공장), 보유자에 이윤옥(질대장), 부창래(도공장), 김정근(굴대장), 전승교육사에 허은숙(도공장), 김서진(불대장) 등으로 이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옹기 전승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허벅

현재의 제주도 옹기장의 전승체계를 정립하는 데는 제주전통옹기전승보존회(회장 허은숙)가 큰 역할을 했다. 제주전통옹기전승보존회는 과거 옹기작업을 해오던 어르신들과 전통옹기를 배우고 계승하려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서 결성한 단체로 2011년 12월 14일부터 17일까지 대정읍 신평리 일대에서 ‘제주옹기굴제’를 개최했다. 이 축제는 제주도 허벅장에서 제주도 옹기장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재지정된 것을 기념하고 옹기 제작을 전통문화로 계승하기 위한 것으로 해마다 축제 기간 다양한 행사와 함께 노랑굴큰불때기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 행사가 제주 옹기의 전승적 측면과 확산적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주도 옹기 제작과정

제주도 옹기 제작과정은 옹기를 굽는 노랑굴 축조, 토림하기, 옹기 제작, 노랑굴큰불때기 순으로 이루어진다.

굴 축조는 가마터 닦기부터 시작한다. 바람의 방향과 장작 수급의 원활한 곳을 고려하여 위치를 정하고 경사 잡기를 한다. 경사각은 자연 경사를 이용하기도 하고 인공적으로 각을 잡아 축조한다. 가마터 닦기가 끝나면 해량돌(다공질 현무암)을 준비해서 배열한다. 돌가마의 제작은 가마의 앞쪽 아궁이부터 제작한다. 아궁이를 기준으로 가마 구획선을 긋고 지반을 정리한다. 가마구획이 끝나면 구획선에 따라 굴 전체 기초 돌을 놓는다. 이때 돌쌓기는 겹담으로 한다. 기초 돌 놓기가 끝나면 가마벽 쌓기를 진행한다. 다음에 가마내부의 길이를 측정하여 홍여틀을 제작하고 고정시킨다. 굴문 용 홍여틀이 만들어지면 가마 출입문 만들기를 진행한다. 이어 천정아치 쌓기와 ᄃᆞᆨ 세기구멍(잿불구멍) 만들기를 한다. 제주도 전통 가마인 노랑굴의 특징 중의 하나는 굴뚝이 없다는 것이다. 굴뚝 역할은 뒷고망이 하는데, 가마 뒤에 4개를 만든다. 불길이 기물에 닿는 것을 방지하고 가마내부의 온도를 고르게 하는 불벽을 만든다. 이어 바람막이 불변을 만들고 가마 내‧외벽에 흙바름을 하면 가마 축조가 끝이 난다.

다음은 토림하기이다. 질대장은 흙의 채취에서부터 질흙을 만들고 그 질흙으로 토림을 만들고 만든 옹기를 건조하고 관리하기까지 넓은 범위에서 작업을 수행한다. 질대장이 사용하는 도구는 흙을 채취할 때 쓰는 삽과 곡괭이가 있고, 질흙을 만들 때 질판, 메, 까끼(깨끼) 등이 있다. 토림을 할 때는 토림판, 토림막개 등을 사용한다. 채취한 질흙을 깨끼를 이용하여 돌이나 이물질을 제거하고 메질을 한다. 메질을 한 질흙을 토림할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직사각 육면체 형태로 뭉친다. 뭉쳐진 질흙을 토림판 위에 놓고 토림막개로 납작하게 만들어 간다. 이 때 두께가 일정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두꺼우면 토림막개로 두드리면서 균일하게 펴 준다.

다음은 옹기 제작 과정이다. 도공장은 허벅, 망대기, 웃통개(항아리)등 옹기를 만드는데 이때 물레, 바닥막개, 수레착, 조막, 홀테, 밀칼, 보로옹(대칼), 물가죽, 물천 등의 도구를 사용한다. 허벅 제작 과정은 열일곱 단계로 진행된다.

허벅 제작 과정
  1. 물레판 위에 흙이 붙지 않게 불채(재)를 살짝 뿌리고 질흙을 올려놓고 바닥막개로 때리면서 골고루 둥글게 편다.
  2. 밀칼로 굽의 크기를 정해 잘라낸다.
  3. 바닥 작업이 끝나면 자른 밑바닥 끝에 토림을 세워놓고 코일을 이용하여 빼비(판과 판 사이를 흙으로 보강하는 작업)를 준다.
  4. 알토림을 잘 정리하고 윗토림을 올려 위아래 토림이 잘 붙게 해준다.
  5. 안과 밖으로 붙인 면에 빼비를 준다.
  6. 윗토림 윗면을 보로롱(대칼)로 잘라내고 수레착으로 뒷면을 쳐주면서 알토림과 웃토림을 잘 붙게 해준다.
  7. 수레질을 한다. 수레질은 수레착과 조막을 이용하는데 수레착의 거친 면을 이용한다.
  8. 어느 정도 형태가 완성되면 수레착의 고운 면을 이용하여 두불 수레질을 한다.
  9. 안홀테와 바깥홀테를 이용하여 면을 고르게 하고 배를 내는 홀테질을 한다.
  10. 수레착의 고운 면을 이용하여 윗배 부분을 홀테질한다.
  11. 허벅의 몸 형태가 완성되면 보로롱을 이용하여 윗면을 잘라준다.
  12. 묽은 흙으로 코일을 만들어 윗면에 돌아가며너 붙여준다.
  13. 물천으로 부리를 싸고 물레를 돌리면서 두께를 균일하게 해주고 부리의 크기를 정해준다.
  14. 물가죽으로 부리를 싸서 허벅의 부리(전)를 만들어주고 곱게 정리하여 마무리한다.
  15. 바같 홀테를 이용하여 허벅 어깨에서 부리까지의 면을 고르게 해준다.
  16. 밑칼(밑고새)로 굽 부분을 잘라 정리해준다.
  17. 보로롱(대칼)을 이용하여 보로롱문, 선문, 파도문 등의 문양을 표현하여 완성하고 물레 위에서 들어낸다.


망대기나 웃통개 등도 형태와 크기에 따라 조금씩 다를 뿐 허벅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제작된다.
옹기가 완성되면 멍석, 나무판자, 가마니 등에 올려놓아 바람이 잘 드는 그늘에서 건조한다. 옹기의 굽을 쳐 북소리가 나면 잘 마른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큰불때기 과정은 굴드림(가마재임), 굴문(출입문)과 ᄃᆞᆨ 세기구멍(잿불구멍) 막기, 피움불때기, 족은불때기, 중불때기, 큰불때기, 잿불질 순으로 이루어진다. 불때기는 불대장이 맡아서 하는데, 불작대기, 불쇠스랑, 물항, 바가지, ᄀᆞᆯ갱이(호미) 등을 사용한다.

굴드림은 건조과정을 거친 다양한 크기의 옹기들을 굴(가마)안에 쌓는 과정이다. 굴드림에서 준비해야 할 것은 구젱기닥살(소라껍데기), 조금(조개류를 빻아서 생긴 가루), 굄돌(받침) 등이다. 굴드림은 포개쌓기 방식으로 하는데, 기물들을 포갤 때 기물끼리 서로 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조금, 구젱기닥살을 사용한다. 이 준비물들은 소성과정에 서로 붙는 것을 막는 역할 외에 기물의 색을 만들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구젱기닥살 속의 염불이 기물에 영향을 주어 훌륭한 자연유(自然油) 역할을 한다. 유약을 바르지 않는 제주 옹기 색채형성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겠다. 굴드림 과정에 또 중요한 것은 기물과 기물을 서로 포개기 때문에 수평 잡기가 중요하다. 이때 바닥 수평을 잡기 위해 굄돌이 사용된다. 굴드림은 소성실(가마 안)의 뒷부분부터 시작하여 다새기구멍(가마 출입구)이 있는 앞쪽으로 전개한다.

굴드림이 끝나면 굴문과 ᄃᆞᆨ 세기구멍(잿불구멍)을 돌로 막고 흙을 물에 풀어서 돌 틈새를 잘 막으면 불때기 준비가 끝난 것이다.

피움불때기는 아궁이 입구에서 작은 크기의 불과 열기, 연기로 아주 천천히 오랜 시간 동안 불을 때서 굴과 굴 안의 옹기들을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굴과 옹기에 남아있는 수분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굴속에 수분이 남아있으면 큰불때기 과정에서 옹기에 영향을 주어 깨지거나 냉해를 받아 그릇이 잘 익지 않으며, 제 때깔이 나지 않기 때문에 피움불을 피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족은불때기는 나무뿌리나 잡목 등을 이용하여 5~6시간에 걸쳐 진행되는데 같은 크기의 불을 유지시켜 주면서 하게 된다.

중불때기는 아궁이 안으로 불이 완전히 들어간 상태로 굵은 나무를 이용하여 불때기를 하게 되는데, 장작을 넣을 때마다 불길을 높게 잡아가야 한다. 중불때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굴속의 그을음들이 제거된다. 가마 맨 뒤 뒷구멍(굴뚝)을 통해 굴안을 보면 불꽃이 생기고 가마 내부가 완전히 빨갛게 달궈진 모습을 보게 된다. 불대장은 내부의 색을 통해 굴 안의 분위기와 옹기들의 표면색을 보고 큰불때기의 시기를 결정하게 된다.

큰불때기 과정은 노랑굴 큰불때기의 가장 특징적인 과정이다. 이때 큰 장작 대신에 섬피(나뭇가지 묶음)를 사용하게 되는데, 대략 5~7시간 동안 큰불때기가 진행된다. 한 사람이 섬피를 아궁이 앞에 던져주고 가마 앞에서 두 사람이 불작대기를 이용하여 아궁이 속으로 섬피를 집어넣어 살짝 들어올리는 방식을 반복해서 진행한다. 이렇게 섬피를 집어넣기 시작하면 가마 뒷고망(굴뚝)으로 검은 연기와 함께 불이 바깥쪽으로 휘몰아쳐 나오게 된다.

마지막 불태기는 잿불질이다. 큰불때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나면 ᄃᆞᆨ 세기구멍(잿불구멍)을 열어 굴속 옹기의 분위기를 살핀 후 잿불용 장작(가늘고 긴 형태의 장작)을 넣어 잿불질을 시작한다. 이때 굴 앞쪽에 있는 ᄃᆞᆨ 세기구멍부터 시작해 뒤쪽 ᄃᆞᆨ 세기구멍 순으로 잿불질을 한다. 첫 ᄃᆞᆨ 세기구멍에 잿불질이 끝나면 잿불구멍을 흙으로 잘 막아준 후 다음 잿불질을 해나간다. 잿불질이 끝남과 동시에 아궁이문도 완전히 막게 된다. 잿불질 과정이 모두 끝나면 가마 뒷고망(굴뚝)을 돌과 흙으로 완전히 막는다. 불때기가 끝나면 3~4일 정도 굴식히기를 한 후에 옹기를 꺼낸다. 이 날을 ‘굴내는 날’이라고 하며 기물들이 부딪치지않도록 하기 위해 무딘끌, 무딘칼, 낭마께 등을 사용한다.

©허벅에 물을 담고 있는 아낙네

제주 사람들이 자연에 순응하면서 생활상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물허벅, 망데기, 웃통개, 고소리 등 옹기에는 육지부의 옹기와는 달리 단순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선과 색감이 주는 자연미가 들어있다. 또한 옹기의 제작과정과 운영방식에서 육지부와는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물허벅은 유약을 바르지 않고 제주도에서 나는 점토만을 사용하여 독특한 제작기법과 실용성을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다. 제주 질그릇이라고 하는 제주도 옹기는 흙에 철분이 많이 포함되어 붉은색이나 갈색을 띤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상태로 굽는 과정에서 자연유의 광택이 나는 점은 타 지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제주 옹기만의 독특한 특징이다. 또한 질대장, 도공장, 불대장, 굴대장 등 기능별로 철저히 분업화된 시스템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지역은 제주도 외에 찾아보기가 힘들다. 물허벅, 고소리 등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모양의 옹기들은 제주 사람의 삶을 잘 반영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제주도 옹기장은 전승하고 보존해야 할 무형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제주도 옹기장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제주특별자치도 무형유산으로 재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