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유산 가치

제주갈옷의 역사성과 학술적 가치

제주의 감물들이기의 풍속과 감물들인 옷의 역사는 420년 전부터이며, 적어도 300년 넘는 역사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성이 구체적인 고문헌과 신문기사에 근거하여 명확하게 입증되고 있다는 점에서 신뢰성 또한 매우 높다. 따라서 감물들인 옷은 조선시대 제주의 농경사회와 지역의 풍토와 풍속의 일면을 설명할 수 있는 역사문화적 가치를 갖는다. 또한 감물들인 옷의 용도와 성격의 변화 및 시대적 변천 양상은 국가적인 측면에서의 일제강점기, 6.25 한국전쟁, 화학섬유산업의 발전, 새마을운동과 농촌의 현대화 정책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지역적 측면에서는 제주의 농업방식의 변화, 산업구조와 종사인구의 변화, 생활양식의 변화 등 제주의 근현대의 역사와 맞닿아있다. 특히, 노동복 용도의 제주갈옷이 이러한 역사적 시대적 흐름에 따라 패션상품과 지역문화상품으로 전환되어 재창조되며 제주 사람은 물론 제주 방문객들에게 시대에 맞게 창의적으로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무형유산적 가치가 높다.

그동안 제주 갈옷에 대해서는 제주도의 향토 복식문화로서 주목이 이루어져왔다. 제주 갈옷과 관련한 학술논문이 113편, 학위논문 34편, 단행본 41권 등에 이를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며, 인문사회적 주목과 더불어 자연과학적 접근도 상당히 이루어져 제주 갈옷의 우수성과 활용성, 지속가능성 등이 입체적으로 조명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특히, 노동복 용도의 제주 갈옷이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따라 패션상품과 지역문화상품으로 전환되어 재창조되며 제주 사람은 물론 제주 방문객들에게 시대에 맞게 창의적으로 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사성과 학술적 가치 역시 높다. 제주 갈옷의 역사성과 학술성이 인정되면서 1990년대부터 전통기능 전승자를 선정하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또한 제주 갈옷의 역사성과 고유의 가치를 인정받아 ‘제주10대문화상징’으로 선정되기도 하였고, 갈옷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이나 갈옷의 친환경성 등 여러 응용분야로 학술 연구도 확장되었다.

제주갈옷의 지역성과 공동체성

제주는 섬 한가운데 한라산을 두고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화산섬이다.

조선시대 제주 사람들에게 농업 활동은 어업과 목축보다 가장 중심적이고 기본적인 생업 활동이다. 조선시대의 감물들인 옷은 농부의 옷이란 점에서 갈옷은 제주 사람들이 척박한 농토에 적응하여 농업 활동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생활문화로 제주의 농경문화와 연계되어 있다. 제주의 토양 대부분은 화산섬이란 지역적 특수성으로 인해 화산 폭발로 나타난 화산재가 퇴적층을 이루어 형성된 화산회토(火山灰土)로 구성되어 있다. 다공성이 특징인 화산회토는 입자가 가벼워서 모래나 먼지처럼 바람에 쉽게 날릴 뿐만 아니라 수분을 함유하지 못해 점착력이 약하고 건조한 특성으로 척박한 농토의 원인이기도 하다.

제주의 감물들이기가 어망, 가구, 어선, 건축 등의 생활용품이나 생활공간에 감물을 칠하는 국내의 다른 지역이나 주변 나라와 달리 농부들의 옷을 감물 들이는 데 특화된 것 또한 제주의 이러한 화산회토가 배경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제주 사람들은 감에 들어 있는 탄닌 성분에 의해 생기는 감물의 결착성에 의한 내구성, 방오성, 방부성 등에 대한 경험적 지식의 축적과 이러한 지식의 세대 간 전승을 통해 농업 활동에서 감물들인 옷을 노동복으로 활용하는 지혜, 곧 전승지식을 축적해왔다고 볼 수 있다.

제주도 이외 육지부 지역에서 전통적인 노동복은 흰옷, 제주도 지역에서 전통적인 노동복은 갈옷이다. 제주도 이외 육지부 지역에서 흰옷 노동복과 제주도 지역에서 갈옷 노동복의 탄생 배경은 과학적인 해석이 요망된다. 그러나 보편적인 탄생 배경은 토양 조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제주도 이외 육지부 지역은 사질토, 제주도 지역은 화산 점질토이다. 사질토는 흰옷에 흙물이 들어가도 쉽게 흙물이 들지 않지만, 화산 점질토는 흰옷에 흙물이 들어가면 쉬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 제주도 지역에서 전승되었던 갈옷은 화산섬 제주도 풍토에서 살아온 제주도 사람들의 문화유산인 셈이다.1)

특히, 제주도는 한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일조량이 높고, 강우량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지만 물이 땅속으로 잘 스며드는 토질 때문에 물이 부족하였다. 부족한 물이라는 조건 속에서 최소한의 물로 감물 염색하는 방법이 더욱 발전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일조량이 가장 많은 음력 7월 백중 전후로 1~2주 기간 동안 감물들이기를 함으로써 효율성을 극대화 했음도 주목된다.

제주도의 감물들이기는 돌과 바람이 많은 제주도의 지역적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특히 감물들이기에서 강조되는 ‘바래기’ 과정은 제주의 이러한 지역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전승지식이라 할 수 있다.

“갈옷이 가진 최상의 질은 바래기에서 결정된다. 밤에 노릇(이슬)을 맞히면 최상의 작품이 나온다. 이슬이 내리는 쾌청한 밤에 주로 눌(낱가리) 위에 편편하게 널었다. 일손이 귀할 때나, 밭이나 들일을 갈 때도 가지고 가서 잔디나 돌 위에서 말렸다. 물이 필요하므로 반드시 물허벅을 지고 갔다.
바래기는 앞면이 햇볕에 완전히 마르면 뒷면으로 뒤집어 넌다. 이때 앞면과 뒷면이 완전히 마르면 물에 푹 적시면서 바래는데, 앞과 뒤 뒤집기는 마르는 대로 계속 반복해야 한다. 바래는 과정이 더해 갈수록 흰색이 점차 발갛게 붉은 벽돌색으로 변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날씨나 시간,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일주일쯤 걸린다. 이때 비가 계속 오거나 장마가 끼면 한 해 갈옷 농사를 망치게 되고 만다.
감즙의 탄닌성분은 제때에 제대로 바래지 못하면 갈옷 본연의 상큼하고 칼칼한 맛과 빛깔을 잃고 거무튀튀하고 칙칙한 볼품없는 태깔이 되어버린다. 내가 직접 만들고, 완성한 갈옷 중에서 마음에 든 것은 매우 드물다.”2)

제주의 자연환경을 그대로 활용한 감물들이기 방법은 햇볕과 바람, 이슬 등이 빚어낸 연금술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조건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부적인 여러 전승지식이 활용되었는데, 감물들이기 전에 옷을 뒤집어서 감물에 치대는 과정, 감물들인 옷을 잘 펴서 고르게 염색되도록 하는 손보기 과정, 눌이나 지붕, 잔디 등에 널어 바래는 과정과 물에 적셔 바래기를 반복하는 과정 등이다.

바래기 과정에서 소금기를 머금은 제주의 바람이 매염제로 작용해서 발색과 여러 기능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한 점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갈옷은 제주 지역의 덥고 습기가 많은 해양성 기후와 척박하고 물 자원이 부족한 지역적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 통기성이 좋고 습기에 강하며, 방부 기능이 있어 땀에 젖은 옷을 그냥 두어도 상하지 않았다. 또한 가시 같은 잡물이 붙지도 않으며 잘 헤어지지 않는 질긴 성질을 갖고 있다. 제주 여성들은 경조사나 외출 시에 겉에 외출복을 입어도 안에는 갈옷을 입었는데, 이는 외출을 하더라도 바로 일터로 복귀하기 위함이며 노동과 밀접한 제주인의 삶을 잘 보여준다. 또한 공동체적 규범을 갈옷 문화에 적용시켜 갈옷 착용 관습을 만들고 지켜온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1935년 조선일보에 실린 제주 기행문에는 “일할 때에는 무명이나 베에 감물을 벌거케 물드린 이섬 특유의 로동제복을 입엇다가도 외출할 경우에는 말숙한 한산세모시를 갈어입고는 머리와 얼골을 수건으로 가리고 나선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3) 또한 이즈미 세이치의 『제주도(濟州島)』 문헌에 따르면, 1937년 당시 제주에서는 외출복에는 감물을 들이지 않았으며, 감물들인 옷 위에 두루마기를 입는 일도 없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일제강점기에는 감물들인 옷을 입고 외출하는 것이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이즈미 세이치는 제주 여성들은 감물들인 바지(柹澁女子袴衣)를 농사나 작업 상황에서는 입을 수 있지만, 공도(公道)에서는 감물들인 바지 위에 흰색이나 검정색 치마를 꼭 입어야 하며, 이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예의에 어긋난 것으로 판정되었다고 기록하였다.4) 이즈미 세이치의 『제주도(濟州島)』 문헌에는 해촌 여자들이 이 규정을 지키지 않아서 다른 마을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은 실제 사례 또한 제시되어 있다.5)

노동복으로서 갈옷의 성격이 계속 이어져 왔고 공동체적 규범으로서 여성의 외출 시에 갈옷 착용을 제한한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속옷의 일종인 옷감에 감물을 들인 갈굴중이가 여성의 노동복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노동할 때의 일복으로서 갈옷과 외출복을 분명하게 구분한 것으로 파악된다. 일과 일상생활의 편의를 위해 갈옷 위에 치마 등을 걸쳐 있을 수 있도록 한 점도 공동체적 규범을 지키면서도 일과 일상생활의 전환을 용이하게 만들었던 전승지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08년 3월 제주 10대 문화상징물을 선정했는데, 한라산, 해녀, 제주어, 제주4.3, 돌문화, 제주굿, 제주초가, 갈옷, 귤, 오름 등이다. 또한 이를 확장하여 자연 분야 23개, 역사 분야 23개, 사회 및 생활 분야 28개, 신앙 언어 예술 분야 25개 등 99개의 문화상징도 선정하였다. 당시 10대 문화상징으로 선정된 갈옷에 대해서는 ‘풋감즙을 들인 전통적인 노동복’, ‘풋감즙을 들인 노동복으로 제주인의 생활의 지혜가 엿보이는 복식유산’ 등으로6) 설명되었다.

제주갈옷의 현재성과 지속가능성

갈옷은 실용, 위생, 경제, 재생, 재활용, 친환경 등 효용 가치가 탁월한 옷이다. 그중에서도 입던 옷이 낡으면 다시 감물을 물들여서 바래 입었다.

이 옷들이 낡으면 재활용거리로, 또는 살림살이 도구들을 재생시키는 보수용으로, 마지막엔 아궁이 불쏘시개로 끝났다. 갈옷은 마지막까지 천연무공해자원으로 마감되었던 것이다. 제주 갈옷은 일 년쯤 입으면 색이 칙칙해지고 촉감이나 강도도 약해지게 되어 그 기능성이 떨어지게 된다. 이 낡은 갈옷에 다시 감물을 들이면 색이나 강도가 좋아져서 다시 입을 수 있게 되었다.7)

1970년대 이후에는 면으로 만든 모든 옷에 감물을 들이게 되었는데, 런닝셔츠와 메리야스 등 속옷부터 운동복, 와이셔츠, 군복 등에 감물을 들여 입게 되었다.

이렇게 갈옷의 전통을 이어 생활 속 다양한 분야에 확장하여 활용하게 되면서 갈옷과 감물들이기는 제주에서 없어서는 안 될 고유의 생활문화로서 각광받게 되었다.

“아버지가 입다가 낡은 갈중이는 재활용거리로 초생아의 몸을 싸는 첫 싸개로 쓰였다. 아기 배꼽 정리를 마치면 갈중이를 바닥에 펴놓고 아기 머리를 갈중이 가랑이 밑 사이에 눕힌 다음 두 가랑이로 몸을 엇갈려 덮고 싼다. 다음으로 아기 발 쪽에 있는 허리말기는 아래서 위로 올려 덮고 감싸면 몸과 자세를 바르게 하면서 어깨에 바람도 들지 않는 완벽한 싸개이자 옷이 되었다.
제주에서 초생아의 목욕은 3일 만에 시켰다. 물이 귀하고 산모의 산(産) 처리나 산바라지는 물론이고, 아기만을 돌볼 여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부드럽게 갈색으로 변한 낡은 갈옷은 아기의 연한 살갗에 닿았을 때 상큼하면서도 부드러운 촉감이라 잘 맞으며, 목욕을 시키지 않은 채 피와 자궁 안의 오물이 엉킨 아기(“핏덩이”이라 했다)를 싸두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초생아 싸게는 물론 특히 남아(男兒)에게 사용되는 물건들은 철저히 남성 것으로만 했다. 남존여비 사상으로 여자는 반쪽짜리이기 때문이라 했다. 특히 갈중이는 생후 첫피복거리이므로 더 각별했다.”8)

제주에서 갓난아기의 첫 싸게로 아버지의 헌 갈중이를 사용했던 전통은 갈옷의 지속가능성과 관련해서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노동의 흔적이 남아 있고 부친의 양기가 담겨 있다고 믿으며 초생아의 건강을 기원하는 유감주술적 관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켜켜이 쌓여온 경험치를 바탕으로 헌 갈옷이 초생아의 위생을 지켜주고 감염을 막아주며 피부에도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지속가능한 전승지식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후반 몸뻬가 유입되어 여성 일복으로 유행하게 되었는데, 제주에서는 몸뻬 그대로 착용하는 방식이 아닌 감물을 들인 ‘갈몸뻬’가 여성 일복이자 생활복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말부터 입기 시작한 몸뻬는 해방과 전쟁으로 삶이 어려웠던 시절 노동복과 일상복으로 자리 잡으면서 감물을 들여서 갈몸뻬로, 입다가 낡은 삼베나 모시옷 특히 적삼이나 고의(袴衣) 치마에도 감물을 들여 입었다.”고9) 한다.

헌 갈옷은 아기의 첫 싸게뿐만 아니라 아기 포대기, 기저귀, 구덕, 차롱, 초신, 담배쌈지 등 다양한 생활용품으로 재활용되었고, 더 낡은 것은 끈이나 청소 걸레 등으로도 활용됐다. 그리고 더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궁이 불쏘시개로 그 질긴 생명력을 마감했다.


  • 갈옷
  • 첫 싸개
  • 포대기, 지성귀
  • 보수, 끈거리
  • 청소걸레
  • 불쏘시개
  • 10)

제주 갈옷은 거의 완벽한 선순환의 지속가능성을 실현하고 있었던 셈이다. 감물들이기 과정부터 불쏘시개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갈옷은 탄소 중립의 모범을 보여주며 가장 지속가능한 옷이자 생활재로서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더욱 눈여겨 볼 부분은 감물들이기가 옷감이나 생활재의 본래 형태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1970년대부터 런닝셔츠, 메리야스, 와이셔츠, 운동복, 군복 등 가릴 것 없이 헌 옷에 감물을 들여 재활용하는 지혜가 발휘되었다. 적삼이나 갈중의 등 전통 의상은 점차 사라져 갔지만 이를 대체하는 옷감 그대로를 감물들이기의 대상으로 확보한 셈이다. 이러한 갈옷문화 전승의 지속가능성은 현대화된 감물염색 패션화 경향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노동복으로서 고유성은 이어가되 다양한 방식으로 확장하면서 생활 속에 녹아들게 된 것이다.

전통을 회고하는 마을공동체의 문화행사 등에 유니폼처럼 사용되기도 하고, 자신의 개성과 지속가능성을 표방하는 철학을 손쉽게 표현할 수 있는 상징적 의복이 되기도 하며, 전통에 기반한 현대적 예술의 소재 등으로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또한 천연염색의 맥락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며 에코 프린팅 등도 시도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전승 지역 또한 전국을 망라할 정도로 한국사회의 보편문화로 확장되고 있다.


자료 출처
  1. 고광민, 「제주 갈옷의 문화유산적 가치」, 「제주 갈옷 전승양상과 문화유산 가치」 학술대회 자료집,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제주학연구센터, 2023.7.10., 121쪽
  2. 고부자, 「제주 갈옷의 전통과 계승 발전 방향」, 「제주 갈옷 전승양상과 문화유산 가치」 학술대회 자료집,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제주학연구센터, 2023.7.10., 7~8쪽
  3. 권덕규, 「동아일보」. 1924. 8. 29.
  4. 이즈미 세이치 지음, 홍성목 옮김, 앞의 책
  5. 홍희숙, 「제주 갈옷의 역사와 변천 양상」, 「제주 갈옷 전승양상과 문화유산 가치」 학술대회 자료집,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제주학연구센터, 2023.7.10., 32~33쪽
  6. 제주특별자치도 홍보자료(2008.3.20.)
  7. 고부자, 앞의 글, 8~9쪽.
  8. 고부자, 앞의 글, 9쪽.
  9. 고부자, 앞의 글, 9쪽.
  10. 고부자, 앞의 글, 같은 쪽.